AI/Web3 요즘 단상

올해 들어 요 몇달간, 쓰고 싶어 쓰는 글이 아니라 써야 해서 쓰는 글만 썼더니 완전히 방전이 되었다. 적게 잡아도 30만자는 쓴거 같은데 뭘 썼는지 조차 기억에 남지 않을 정도로 매일 나를 소진하는 글을 썼다.

ChatGPT 덕분에 그래도 약간은 도움을 받고 있다. 걔가 좋은 글을 창작해주지는 못하지만 앞으로 5년 뒤 정도면 사람이 글을 쓸 필요는 확실히 없어질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건 이제 확실하다. 글 잘 쓰는 사람의 범주가 과거에는 일할 때 필요한 글(보고서나 공문서, 기획안 등)을 잘쓰는 사람이었다면 이제는 그런 글은 잘 쓰는 사람이라도 굳이 직접 쓸 필요가 없어질 것이다. 그냥 아이디어나 스토리만 알려주면 AI가 너무 잘 써올테니 말이다.

글로 먹고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확실히 위기다. 내 글을 학습해 나보다 잘쓰는 애가 나오는데 그걸 공공재로 뿌린다고 한다면 나의 전문성은 더 이상 큰 의미가 없을 것이다. 웹툰도 그러하다. 음악도 그러하다. 심지어는 동영상도 그러하다. 지금도 그런 것들이 나오는데 5년 뒤면? 아마 누구나 구성과 원하는 등장인물과 배경만 알려주면 뚝딱 유튜브에 올릴만한 영상이 튀어나올 것이다. 속도와 비용이 비교가 안되는데 방송국이 아니고서는 전문 편집자를 고용할까?

번역기의 인터페이스와 성능이 월등해지면, 외국어를 배우기 위해 노력하는 행위가 진정 어떤 의미가 있을까 궁금해진다. ‘그래도 편하게 대화하려면 직접 하는게 좋지 않겠나?’ 하겠지만, 어설프게 직접 하는 것 vs. 약간의 기기를 착용하고(에어팟 하나라도) 원어민 수준으로 대화가 된다면 나는 설사 외국어를 할줄 안다 하더라도 고민하는 시점이 올거 같다. 오히려 상대방을 배려해서.

기업마다 내부 데이터를 학습해 파인튜닝해 일종의 ‘삼성GPT’를 만드는 일이 그다지 의미있는 비즈니스가 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ChatGPT와 그 이후의 멀티 모달 모델들이 진격의 거인처럼 나오면서, 한국뿐 아니라 여러 나라에서 특정 데이터에 특화된 자체 모델을 개발하고 있던 많은 AI 회사들의 입지가 난처해진 것도 사실이다. AI 회사가 ChatGPT API를 사용해 만든 제품이 히트작이 되는 것은 축하할 일인가? 안타까워할 일인가?

세종대왕이 후세에 미친 영향은 엄청났는데, 그 영향은 아래한글에서 인공지능까지 미친다. 한글이라는 특수 언어를 사용하는 덕에 우리나라는 영어 기반 소프트웨어 회사들이 들어오기 약간 불편한 환경을 가지고 있다. 그 덕에 한컴이 거의 30년을 내수 장사로 먹고 살고, AI에서는 네이버와 카카오가 그렇게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한글에 영 젬병인줄 알았던 ChatGPT가 GPT-4 이후 장족의 한글 성능을 보여주면서, GPT-5나 6 정도 되면 과연 국산 업체들이 ‘한글 데이터’를 유일한 무기로 해자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은 결론이 날 것이다. 그러나 한컴과 안랩을 대한민국 정부가 IMF 이후로 지금까지 먹여 살리고 있는 것처럼, 네이버와 카카오의 AI도 국가 기간 산업처럼 정부가 멱살잡고 예산 태워 끌고 갈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국산 API 사용하는 기업들에게 보조금도 지급하고.

GPT 3.5 Turbo, ChatGPT API, Whisper API, GPT-4, LLaMA, BARD 등등 3월 한달간 AI 선두 업체들이 췄던 칼춤 덕분에 가뜩이나 위태롭던 Web3는 이제 확실히 잠시 잊혀진 듯 하다.

Web3쪽은 대형 게임사들이 올해 좋은 타이틀에 NFT/Crypto를 도입하며 실질 유저를 키우는 것은 가시화 될 듯 하다. 여러 대형사들이 준비하고 있으니. 그리고 L2, 특히 zkRollup 기반 L2들이 나오면서 올 여름 Mini DeFi Summer가 올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크립토 보상을 바탕으로 한 AI 서비스 등 Web3+AI 두 진형의 만남도 여러 프로젝트에서 시도될 것으로 보인다. 이미 그런 제품을 우리 메셔에서도 선보였고.

우리가 네이티브를 개발하고 메셔의 Swalo를 가까이서 지켜보며 든 느낌은 대화형 UX가 신기하지만 아직 대화형이어서 더 좋아지는 것이 무엇인지는 잘 모른다는 것이다. ChatGPT에 쿠팡 플러그인이 붙는다고 쿠팡 앱에서 사는 것보다 편하려나? 아닐 것이다. 의외로 대화형 UX가 그간의 사용자 경험을 압도하거나 적어도 개선하는 분야가 생각보다 많지 않을 것이라 전망한다. 이미 익숙하게 잘 쓰고 있는걸 바꾸는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요새 식당의 키오스크를 끔찍해도 쓸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그게 식당 입장에서 압도적으로 비용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서 아끼는 걸로 이제 배달의민족 수수료를 내고도 수익을 올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대화형이 과거 UI형에 대비해 소비자 입장에서나 서비스 제공자 입장에서 누구든 압도적인 개선-뚜렷한 매출 증가 또는 가시적인 비용 절감-을 이루지 못한다면 유행처럼 챗봇 만들고 ChatGPT 플러그인 만들었다가도 내년 정도 되면 금방 현타가 올 것이다.

그러니 이거는 기존 서비스의 고객 접점 확대나 판매 채널 확대 정도로 보면 큰 의미가 없고, 기존에 안되던걸 ChatGPT를 활용해 되게 만드는 방향으로 가는게 좀 더 확실해 보인다. 비용 절감 또는 매출 증대의 방향으로.

Web3도 사라지진 않겠지만 분명 작년의 NFT나 SBT, L2 등 여러 최신 유행 이슈들의 실질 효용에 대해 증명하는 기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때까지는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더듬이를 쫑긋 세우고 시장 흐름을 주의깊게 관찰하며 여기저기 어느정도 발도 담그고 있어야 한다.

누가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세상이니. 우리가 쓰던 은행이 갑자기 망했다. 작은 은행도 아니고 상장사이자 자산도 아주 많던 뉴욕 시그니처뱅크였다. 그 바로 전 달에는 몇달간 같이 작업하던 미국 최대 크립토 PG사가 갑자기 망했다. 전날까지 같이 슬랙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다음날 사업중단 소식을 뉴스로 보고 안믿겨 슬랙에 들어가니 거짓말처럼 슬랙 채널에서 모두가 갑자기 사라졌다.

USDT 욕하며 등장한, 제일 안전하다던 USDC 페깅도 깨졌다. 넘사벽이었던 FTX도 망했고. 지금 잘나가는 회사들 갑자기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거시 경제 환경도 그렇고 전반적으로 눈을 똑바로 뜨고 험준한 길을 정확히 직시해야 할 때다.

지난 20년간 언제나 어려운 구간을 넘어서 살아 남았으므로 살아남는 것 자체는 자신이 있다. 하지만 어쨌든 그 과정이 매우 Stressful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단순히 살아남는게 중요한게 아니라 모두의 스킬이 상향 평준화 될 5년 뒤에는 무엇으로 우리가 사람들이 찾는 제품을 가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 지금 내가 산을 오르며 생각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질문이다.

유발 하라리가 2017년에 쓴 <호모데우스>의 서문에는 인공지능에 대한 엑세스 격차가 커지면 남북한의 통일이 점차 더 어려워질거라는 시나리오가 나오는데 GPT-4를 보며 진정으로 그런 생각을 한다.

5년쯤 뒤에 만약 미국의 빅테크 기업들이 모두가 안쓰면 자기 수준이 떨어져 쓰는 것이 기본이 되는 AI들을 내놓는다고 치자. 한 GPT-10 정도일텐데 남한은 GPT-10에 엑세스가 있고 북한은 제재로 인해 원활하지 않다고 한다면 그 격차는 앞으로 치명적일 것이다. 남북한에 대한 이런 비교는 곧 모든 기업들 사이, 개개인 사이에도 동일하게 적용될 것이다.

AI 개발은 불가능하고, 세종대왕이 주신 한글을 가지고 아래한글 정도를 만들 기회가 있다. 그래봐야 한컴, 안랩 정도 시장일테고 그마저도 국내 대기업들의 시장일거다. 그렇다면 그냥 AI 응용을 잘해야 하는데 그건 이제부터 생존의 문제일 것이다.

왜 갑자기 뒷북으로 AI, AI 하냐고 묻는다면 작년까지는 ChatGPT가 없었으니 일반인이 AI를 체감하고 직접 쓰면서 자기 스킬을 강화할 수 없었다면 지금은 초등학생부터 우리 어머니까지-실제로 본가에 갔더니 어머니가 유튜브를 보시며 ChatGPT를 공부하고 계셨다- 정말 누구나 가장 앞선 기계 두뇌의 능력을 활용할 수 있게 된 탓이다.

AI 연구는 당근 뒷북이고 모르고 할 생각도 안하지만 AI 응용은 확실히 이제 시작이라 앞으로 시장이 커지고 사람도 많아지고, 제품과 유저도 계속 늘어날 것이다. MS가 Office에 Copilot 탑재해 관련 섹터 스타트업이 곡소리 나는 것처럼, 대기업이 들어올 영역의 일은 잘 피하는 것도 앞으로 응용 분야에서 고민할 지점일 것이다.

여담이지만 네이티브를 깜짝 출시했더니 그 다음 날 바로 행사 초대를 받아 가서 과기정통부 장관을 만났다. AI 대표 스타트업으로. 거참 내가 봐도 웃기는 일이긴 한데 아무튼 가서 보니 나 빼고 거의 다 박사님이었다. 그러니 AI 분야는 현재까지 연구자가 대부분이라는 이야기인데, 앞으로 나같은 어중이 떠중이들이 많이 들어갈 것이다. 요즘 AI 이야기를 나같은 떠중이가 하니까 무시도 받고 약간 텃세도 느끼는데 뭐 어느 분야나 그렇지 않겠나.

그래도 3년쯤 지나서 보면 내가 오히려 빨리 들어간 축에 속할 것이다. 지금 있는 사람들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많은 새로운 떠중이들이 우루루 들어갈거고, 그래야만 또 그 분야가 발전할 것이다. 지금은 연구자만 있고 응용 인력이 없는 셈인데, 응용 선수들이 들어가 훨씬 쉽고 재미난 제품들 쏟아내고 해야 유저도 많아지고 분야 전체가 커진다. 사실 Web3도 똑같다.

(Web3는 아직 ChatGPT moment처럼 일반인에게 확실히 효용을 주는 경험을 아직 선사하지 못했다. AI보다 많은 응용 쟁이가 이미 들어와 6년을 했지만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은 그냥 없는 것이 아닐까? 나는 개인적으로 Web3 최고-이자 최후-의 발명품은 크립토 자체라고 생각한다. 그거 자체가 이미 스테디셀러인데 자꾸 왜 블록체인으로 굳이 인터넷을 다 바꾸려 하는지. Web3쪽 사람들은 주객이 전도됐다는 생각을 언제나 떨칠 수 없다.)

그런데 문제는 모두가 ChatGPT라는 같은 두뇌에다 대고 때리기 때문에 딱히 대단한 우리만의 해자를 파기 참 어렵다는 것이다. 응용 쟁이는 최소한 유저가 남든 데이터가 우리한테 쌓이든 해서 선점 효과를 누려야 하는데 결국 나나 너나 다 ChatGPT한테 쏘는거면 글쎄 겉의 UI라든지 뭐 질문 프롬프트를 우리만 나름대로 ‘비기’를 만들어 때린다든지 해도 그게 길어야 6개월 갈까 싶다.

근데 또 처음으로 돌아와서 ChatGPT 쓰기 싫어하는 기업들 대상으로 ‘우리만의 ChatGPT 합시다’ 해서 파인튜닝을 해준다 한들, 그게 또 B2B 턴키 외주 개발(+ 약간의 매월 운영비 = 딱 그냥 코스닥 정도 갈 사이즈의 매출이 나올만한 사업) 외에 딱히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

그래서 원래 AI를 하던 집이야 뭐 그걸로 계속 가야하니 어쩔 수 없이 위 사업(파인튜닝)을 한다 한들 우리 같은 뉴비들은 좀 더 넓게 탐색하는게 맞는게 아닌가 싶다. 그런데 또 결국 사업이라는게 존버하면서 막 천만원짜리 1억짜리 외주도 뛰고 하면서 그냥 살아남고 해야 뭐 근사한 것도 하는거니까 그런 측면에서는 당장 물 들어왔을 때 노 저으며 일단 매출 땡기는 사업이 또 저런 삼성GPT 같은거 만들어주는 사업이 아닌가 싶은 마음도 들고.

암튼 요새 무지 바쁘고, 써야 해서 쓰는 글에 파묻혀 생각도 거의 못하고 사는데, 일단 나는 이런 고민들을 간헐적으로 머릿속에서 하며 지나고 있다. 요새 더 나아가 SNS는 왜 하나, 다 접을까 하는 생각도 옛날부터 했지만 더 심각하게 하고 있다.

그런데 오늘 DM으로 또 중요하고 감사한 제품 버그 제보를 하나 받아서, 참 또 이런 것들 때문에 SNS 접지를 못하고 꾸역꾸역 15년이나 좋아요를 갈구하며 시간을 버리고 살아왔다. 앞으로 살아가야 할 세상과 내가 임하는 자세에 대해 생각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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