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사 기간의 감정들

# 들뜸

KBW 기간이 시작됐다. 행사가 열리면 서울에 온 외국인들이 연락이 많이 온다. 원래 알던 사람도 있고, 이참에 얼굴 좀 보자는 사람도 있다. 참 혼란스러운 것이, 이게 비즈니스 기회를 열어주는 것인지, 아니면 시간을 뺏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점이다.

이 업계는 ‘이거 하자, 저거 하자’ 요청이 너무 많은 곳이어서, 자기가 줏대를 세우지 않으면 이리저리 끌려다니게 된다. 그러다보면 열심히 일했는데 정작 남는건 없는 상황이 발생하곤 한다. 그래서 요즘은 들어오는 BD들마다 “만나자 찾아오는 사람 말고 우리가 만나야 하는 사람을 만나는데 시간을 쓰려고 노력하세요”라고 주문한다. 안그러면 ‘열일하는 기분’만 들고 결국 성과는 없기 때문이다.

물론 나도 외국 가면 원래 알던 사람에게 연락해서 밥 한끼 하자고 하는게 인지상정이니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한다. 그러나 아직 대표가 많은 일을 하는 구멍가게 사장이다보니 부담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아직 대답을 못한 연락이 많은데, 바쁘다고 칼같이 끊어내야 할지 그래도 또 연락 다 받아주고 커피챗하며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할지 곤혹스럽다.

명확히 주고 받을 비즈니스가 있다면 당연히 만나는데, 대체로 이 시즌의 연락은 그런 것들이 잘 보이지 않는다.

# 기회

물론 BD 일이라는게 우선 친해져야 비즈니스도 있는거니까, 먼저 이런 이벤트들에서 만나 안면 트고 나서 필요할 때 일이 전개되는 경우도 왕왕 있다. 우리도 작년에 싱가폴에서 우연히 동석한 회사가 기억나 보안 감사를 맡긴 적도 있고, 상장도 그렇게 인맥으로 이루어진 경우도 있다.

하지만 언제 어디서 일어날지 모를 연결을 위해 한 주간을 다 새로운 만남에 쓰는 일은, 다 해보고 나서 돌아보니 꼭 필요한 일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러니 BD들끼리 만나는 수준에서 힘을 크게 주지 않는 편이 이 시즌을 보내는 현명한 길인 것 같다.

물론 과거를 돌아보면 이런 이벤트에 적극 내보냈던 BD들이 이벤트를 계기 삼아 이직한 적이 몇번 있었다. BD만 이런 이벤트를 다니는데, BD가 이직해 버리면 그나마 있을지 모를 연결의 기회는 원점으로 돌아간다. 그런 점이 회사들이 잘 관리해야 할 부분이라 생각한다.

# 소외

이 업계에 들어와 더 어릴 때에는 이런 행사가 서울서 열릴 때마다 ‘나도 해외에서 온 최상위들과 따로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많았다. 초기 한두 해는 실제 만난 적도 있었는데, 이후로는 별로 그럴 기회가 없었다.

그런 바람으로부터 초연해진다면 이 시즌에 여러 감정이 들지 않을지도 모르겠는데, 아직은 약간의 소외감이 있는 것 같다. 작년, 재작년, 그보다 더 오래 전에는 그게 더 컸던 것 같다.

‘내가 누구와 미팅을 한다’, ‘이 시즌에 누구와 따로 만난다’가 지금 나의 위치를 말해주는 듯 해서, 내가 바라는 사람과 만날 수 없는 나 자신에 대해 이 시즌에 언제나 스스로에 대한 불만이 있었다. 또 과거엔 나도 그런 사람들을 만날 때도 있었으니, 내 절대적 위치 변화와 상대적 비교가 결합해 더욱 이 시즌이 불편했다.

그런데 올해는 꽤 많이 달라진 것 같다. 기대가 없으면 실망도 없으니, 나의 과거나 남들과의 비교가 없으면 그다지 소외감 느낄 것도 없다. 그래서 그냥 지금 나는 원래 이렇고, 열심히 노력해서 언젠가 또 좋은 사람들과 만날 수 있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한다.

100% 떨쳤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래도 80% 정도는 떨쳐낸 것 같다. 중요한건 한 번 만나는 것이 아니라, 만났을 때 내가 상대에게 필요한 뭔가를 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지금은 딱히 줄 것이 없다.

# 황홀

이런 행사 시즌은 누가 더 많은 행사를 주최하고, 누가 더 많은 행사에 초대 받았느냐에 따라 ‘내가 주인공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한다. 물론 그 중에는 가끔 주인공도 끼어 있지만, 대체로 이런 기분을 느끼는 이들의 열 중 아홉은 실제 주인공이 아니다.

하지만 살면서 주목을 바라는 사람들이 이 때만큼 일시적으로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기도 또한 쉽지 않다. 회사도 마찬가지고, 그 회사에서 일하는 개인도 그러하다. 그러다보니 국내외에서 한두 번 만이라도 화려한 행사 시즌에 참여하게 되면 금세 중독되고 만다. 현실 세계에서는 주인공이 된 듯한 기분을 주는 일이 거의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스타트업이라면 투자 받은걸 발표하고 축하받는 이틀 정도의 시간 정도랄까.

하지만 Web3는 매년도 아니고 마음만 먹으면 매월마다 세계 여행을 다니며 그런 황홀감을 느낄 수 있다. 그러다보니 크립토 BD를 하고 나면 다른 어떤 일도 성에 안찰 수 밖에 없다. 어떤 업계도 매달 세계여행을 다니며 파티를 하는 업계는 현생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작년에 한 대기업 부사장과 그 급의 몇몇 분과 와인 한잔 하는 자리에서 나는 ‘이 업계에 왜 아직 남아있냐’는 질문을 받고 농반 진반으로 ‘이미 Spoil 되어서’라 답한 적이 있다. 하룻밤에 2천만원씩 쓰는 파티가 한 시즌에 150개씩 열리는 업계는 다른 곳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멀쩡한 사람도 여기 발을 들이는 순간 다른 모든 곳이 시시해진다는 설명과 함께 말이다.

이곳은 제품 개발은 어렵고, 성공은 더욱 어려운데, 파티는 어느 곳보다 많다. 내가 주인공이 된 것 같은 착각을 느끼게 할 기회도 그 어느 곳보다 많다. 여기만큼 실제 지표가 시시한 곳도 없는데, 파티 하나만큼은 다른 모든 업계를 시시하게 만든다.

# 현타

그래서 이제는 좀처럼 덜 시시해지기 위해 이번주에는 일부러 행사와 무관한 약속들을 많이 잡았다. 행사가 시시하다는 말이 아니라(행사는 오히려 정말 넘사벽이 되어가고 있다), 그 시즌만 되면 아직도 들썩이는 내 수준과 감정이 시시하다는 말이다.

그래도 이런 감정의 흐름도 어느 정도 이 업계를 두루 겪었기 때문에 이르게 되는 것 같다. 소위 말해 ‘현타’가 온 것인데, 이벤트 사업을 할 것이 아니라면 이 업계에서 어느 시점에는 모두가 도달하는 지점이라 생각한다.

어쩌면 그것이 아무리 좋은 파티에 가봐도 내가 기다리는 사람을 찾을 수 없는 이유가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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