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KBS 다큐 3일에 구로디지털단지의 중소벤처기업들이 나왔는데 너무나 공감이 가서 보는 내내 몇 번이나 뭉클해졌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벤처를 하는 이들은 과거 6,70년대 섬유 벤처 ‘선배’들로부터 내려온 일종의 역사의식을 가지고 사업에 임해야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에 벤처 정신이 없다고 하는건 내가 볼때 미국식 벤처 기준의 지극히 편협한 시각인 것 같고, 사실 옛날 산업 부흥기로부터(지금 대기업들도 초창기엔 다 벤처였으니) 80년대 들어 등장한 기술창업 시대, 그리고 90년대 벤처기업 시대, 2000년대 닷컴 시대를 거쳐 지금 2010년대 스타트업 시대까지 끊임없는 도전의 역사가 계속되어 왔다고 생각한다.
그 시대에 유행하는 용어가 무엇이든 간에 후배들은 자기가 처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선배들이 과거 시간을 통해 배웠던 소중한 경험을 전수하고 의미있는 교훈이나 정신은 또한 다음 세대로 계승할 필요도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한국식 벤처의 정신(spirit)이 생각보다 굉장히 강하고 해외에서도 어느정도 통할만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요즘 보면 인사, 조직, 문화 모든 면에서 너무 미국식 스타트업 스타일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가 있다.
전 사회적으로 미국 눈치를 많이 보는 나라이다보니 창업벤처가 미국스러우면 아무래도 한번 더 쳐다보게 되고 하는 잇점이 분명 있을 수 있지만 나는 지금 우리 벤처계에도 영어공용화 이슈와 비슷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 벤처의 고유한 정신과 나름의 긴 역사성도 모르거나 존중하지 않으면서 미국의 테크크런치만 보면서 기백만불 투자니 M&A니 스타트업이니 하는 이야기만 ‘쿨하다’고 받아들이는 양상은 지극히 편협하고 비현실적인(사업은 한국에서 하는데 눈높이는 미국에 맞춰져 있는) 헛똑똑이만 양산하는 과정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있는 것이다.
나는 언젠가 한국 벤처계를 책임질 지금의 우리 젊은 세대가 선배 세대들이 겪었던 고충을 이해하고 그들의 노력을 존중하며 그들의 시간을 있는 그대로(그 모든 과오까지도) 느끼고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역사의식이 있어야만 나의 소중한 선배들이 각자의 길에서 보여준 모습이 나에게 큰 이정표가 됐듯, 지금 우리의 모습이 훗날 다른 후배들에게 작은 불씨라도 될 것이오, 지금 우리가 쓰고있는 이 부끄러울 정도로 소박한 하루하루의 시간이 또한 긴 대한민국 중소벤처기업사의 한 페이지로 오롯이 기록될 것이기 때문이다.
누가 보면 오지랖이라 하겠지만 어쨌든 나는 선배들의 길에서 너무 많이 배웠고, 그들의 영광스런 어제와 초라한 오늘(또는 초라한 어제와 영광스런 오늘)을 계속 목격하고 있으며 동시에 똑똑한 다음 세대의 등장을 기쁘게 바라보고 있는 중간 연결고리 세대의 일원이다. 그렇기에 더더욱 한국적 중소벤처기업 정신의 계승 발전에 대한 일말의 책임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 모두가 미국식 스타트업 기준으로 된 책을 보고 그 기준에 부합되는 멘토를 찾아다니고 하겠지만 적어도 나를 찾아오는 몇 안되는 후배들에게만이라도 나는 이같은 한국적 벤처정신의 의미와 저력을 소개하고 과거 우리 선배들의 과오로부터 가장 먼저 배우도록 할 것이다.
나는 우리 후배들이 97년부터 2002년 사이 한국 벤처사에 일어난 흥망성쇠를 제대로 공부하는 것만으로 묻지마 창업을 몇 번 해보는 것 이상의 많은 공부가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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