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홍콩에 와있다. 스물두살에 별 생각 없이 사이트 하나 연 이후로 한 번도 쉬지 못하고 다음주면 서른이 된다. 남들 다맞는 서른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지만 쉬지 않고 달렸던 나의 20대를 마무리 할 약간의 여유라도 가져야겠기에 처음으로 일주일 휴가를 쓰고 주말을 포함해 열흘간 서울-런던-파리-스트라스부르-파리-서울-홍콩-서울로 이어지는 여정을 소화하고 있다.
여행 온 첫 날부터 느낀거지만 한 발짝 빠져본다는 것은 안에서 아웅다웅 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값진 경험이다. 2,3일 뒤로 빠져서 보고 다시 들어가 2주 노력하는 것이, 안에서 4주 노력하는 것보다 훨씬 의미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여러 사정으로 당분간 다시 휴가를 못떠나겠지만 나중에 모든 주변이 정리되면 여행을 삶 속에 정례화해 놓아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여행을 떠나기 전 주에 만난 어느 선배는 나에게 “우리 이전에 수십억년의 역사가 있었고, 우리 이후에도 또한 수십억년의 역사가 있을진데 기껏해야 100년 살다 가면서 두렵거나 부끄러워서 무언가를 못해본다는 것은 너무나 아까운 일”이라고 했다. 스쳐 지나가는 말이었는데 나에게는 강렬하게 와닿았다. 우리 업계 선배가 아니라 패션으로 일가를 이룬 선배의 말이었는데 확실히 다른 쪽 사고를 하는 사람들을 만나야 내 사고의 지평도 넓어지는 것 같다.
여기 여행와서의 일이다. 혼자 대영박물관에 갔는데 나는 이때껏 살면서 듣도 보도 못한 ‘리키아’라는 나라의 유물과 벽화, 심지어 신전이 그대로 뜯겨 전시되고 있었다. 설명을 보니 기원전 6세기쯤 지금의 터키 영토 어딘가에 있던 나라라는데 영국 고고학자에게 발견되어 몽땅 옮겨진 것이었다. 그나마 운좋게 영국에 발견되었으니 사람들이 많이 찾는 대영박물관에 전시라도 되지, 그도 아니었으면 2,600년이나 지난 지금 내가 리키아란 나라에 대해 알 수 있었겠는가 싶었다. 그들의 벽화를 자세히 보니 사는 모습이 지금이랑 크게 다르지가 않다. 밥 먹고 옷 만들어 입고 놀고 자고 애 키우고 채집하고 그런 일상의 풍경이 기원전 6세기에 벽화로 그려져 있는 것이다.
생각해보니 위의 선배의 말과 교차되면서 순간 아찔했다. 지금의 나는 무엇을 남길 것인가. 그나마 우리가 아는건 리키아라는 나라 정도이지 그 때 그 나라를 살던 사람은 전혀 누군지도,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히 있었다. 먹고 마시고 울다 웃다 먼지처럼 사라진 벽화에 그려진 사람들이 있었다. 우리랑 별반 다르지 않은. 그렇다면 과연 나는 무엇을 남길 것인가. 2,600년이 아니라 200년만이라도 존재가 먼지처럼 사라지지 않을 삶은 무엇이 있을까? 그것이 이번 여행이 남긴 가장 큰 화두다.
앞으로 수십억, 뒤로 수십억년 사이에 낀 100년 남짓한 작은 시간과, 비행기를 타고 오며 운해 위로 보이는 선명한 별들과 그 위의 드넓은 우주, 그리고 운해 너머로 보이는 히끄무레한 지평선 사이의 어느 애매한 공간에 떠있는 ‘나’라는 시공간의 점은 무엇을 해야 그나마 100년을 의미있게 살 것인가에 대해 많은 회의가 있었다.
이제 여정을 마치기 이틀전, 이 새벽 홍콩에서 다시 열흘간 일부러 멀리하던 뉴스를 보고, 이메일을 읽으며 지극히 시시콜콜하고 사소한, 그러나 잘 해내야 하고 이미 익숙해진 나의 일상 속으로 돌아가려고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항상 나 자신과 주위에서 하루하루 벌어지는 사소한 일들에만 집중하며 살았지 무한한 시간과 공간 속 작은 점으로서의 나를 인지한 것은 이번 여행이 준 가장 큰 축복이자 가장 큰 고민거리가 아닐 수 없다.
그래도 시공간의 점이라는 이유로 허무주의에 빠지면 안될 것이다. 시공간의 점이기 때문에 오히려 조금 큰 방점이나 선 정도가 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는게 옳을 것이다. 돈을 많이 벌어 전 인류를 진보시키는데 그 돈을 쓴다거나 그나마 후세가 발견하고 기억할 확률을 높이기 위해 조금 더 부강하고 오래 가는 나라를 만드는 것, 그리고 나보다 조금 더 오래 살 사람들에게 내가 생각하는 바를 전해주고 같은 생각을 하는 이들을 조금은 더 이 세상에 많게 하는 것. 결국 잠깐 살다 먼지처럼 사라질 것이기 때문에 그 과정에 있어 최대한의 경험과 기쁨과 슬픔, 행복과 좌절을 모두 다 풍부하게 겪으며 사는 것, 그리고 그 과정을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며 나와 함께한 시간을 조금 더 오래 추억해 줄 가족을 만들고 사랑하는 것. 혼자서는 할 수 없는 멋진 일들을 마음 맞는 사람들과 함께 도전해 보는 것. 그것이 내가 이 시공간의 점으로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이 아닐까 한다.
그러고 보면 인간의 삶이라는 것이 얼마나 허무한가. 생각할 수 있는 동물로 태어나 매일 고민하며 한 발짝씩 겨우겨우 진보하지만 결국 그 모든 것이 시공간의 차원에서 볼 때 그저 작디작은 점일 뿐이다.
많이 경험하고, 친구들과 즐거운 교류를 나누고, 가족과 연인을 사랑하고, 보람을 느낄 일을 찾고, 앞의 다른 것들을 잃지 않을만큼의 돈을 벌며 최대한 오래 건강하게 살아가는 것. 그것이 그나마 점으로 태어난 내가 만들 수 있는 가장 행복한 삶이 아닌가 한다. 그러다 수천년이 지나서 리키아처럼 아주 운이 좋게 나와 내가 남긴 것들의 흔적을 발견하는 이가 있다면 그건 덤이리라.
나는 다시 하늘에서 내려와 하루하루가 전쟁같은 일상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30대의 생각의 지평은 아마 조금은 더 넓어질 수 있을 것 같다.
Leave a Reply